논리-철학 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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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명한 철학서이다.
1914년에 집필이 시작되어 1918년에 최종 원고가 완성되었고, 1921년 독일에서 『자연철학 연보』에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러셀의 서론과 함께 처음으로 게재되어 이후 1922년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에 의해 보완된 영역본이 출간되었다.[1]
『논리-철학 논고』는 러셀의 서론, 모토,[2] 머리말[3] 과와 본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본문은 제1번부터 제7번까지의 명제들과 각각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4] 그 부연 설명들을 포함한 전체 선언[개별] 명제는 모두 525개이다.
『논고』의 구조에서 주제들에 따른 분류는 대표적으로 글록과 랑게의 분류가 있다.
세계는 성립되어 있는 사항들의 총체(1)이며,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1.1)이다. 사실은 성립될 수 있는 사태(2)를 뜻한다. 원자적 사실을 주장하는 (참 또는 거짓인) 명제는 요소명제라고 불리며 이것은 이름(혹은 대상)으로 구성된다-그리고 이 이름(혹은 대상)은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4.1212). 요소명제는 가장 단순한 명제로 다른 요소명제를 함축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독립적이다).[16] 요소명제는 논리적 조작이 포함되어 있다(5.47).[17] 요소명제는 다른 요소명제와 관계하여 분자명제가 된다. 이러한 명제들은 사태의 성립과 불성립을 묘사하고(4.1), 참인 명제의 총체가 자연과학 전체(혹은 여러 과학의 총체)이다(4.11). 논리학의 명제는 항진명제(6.1)이고 따라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고(5.142) 무의미하다(4.461). 논리는 선험적(6.13)이며(마치 빨간색 공과 파란색 공이 들어있는 상자 안에서 하나의 공을 꺼낸 것이 빨간색 또는 파란색 공인 것이 항상 참이며 빨간색 그리고 파란색 공인 것은 항상 거짓임이듯이) 명백히 뜻을 지닌 귀납법칙은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학의 법칙이 될 수 없고 선천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6.31). 미래의 사건들은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고, 인과 연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5.1361) 세계의 의의는 세계 밖에 있어야 하며, 비우연적으로 일어나고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세계 속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다시 우연적일 테니, 그것은 세계의 밖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논리가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고, 세계의 한계가 그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다이어그램을 그린다. (「논고」 6.1203)
러셀은 수를 논리적 개념들만을 써서 정의하던 중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그런 모든 집합들로만 이루어진 집합이 어떤 경우이든 모순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흔히 이발사의 역설로 불리는데 대강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마을 사람의 머리만을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다면 이발사 스스로 머리를 깎는 경우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으로 얘기될 수 있다. 이발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으면 자기 자신의 머리를 깎으니 깎을 수 없고, 스스로 머리를 깎지 못하면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사람이 되니 깎아야 한다.뱅글뱅글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3.332에서
'='에 대해 러셀은 차이를 식별할 수 없는 두 존재자는 동일하다는 정의를 내린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5.5303 두 사물에 대해 그 둘이 동일하다는 말은 난센스이며, 하나의 사물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고 반박한다. 그래서 그는 러셀이 'a=a'나 'p는 명제이다'를 일부러 기호화하여 'p⊃p'로 쓰는 것을 거부하고 비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f(a,b).a=b'라고 쓰지 않고 'f(a,a)' 또는 'f(b,b)'라고 쓰며, '(∃x,y).f(x,y).~x=y'라고 쓰지 않고 '(∃x,y).f(x,y)'라고 쓴다. 이러한 입장은 제거주의적으로 오컴의 면도날과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사용되지 않는 기호는 의미가 없다."며 이것이 "오컴의 격언이 말하는 바이다."라고 한다(3.328)
19세기 말 유럽수학계의 주요 떡밥이었던 '집합론은 과연 수학의 토대로 적절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논고」에서도 '수학에서 집합론은 전혀 쓸데없다.[19] '라는 말이 나온다! 집합론을 옹호한 스승 러셀과 또 다시 대비되는 부분. 그가 집합론이 가장 앞에 나오는 오늘날의 수학 교과서들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논고」를 읽다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명제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동료 학자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령, 시인 줄리언 벨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러니한 태도를 풍자하며 시를 지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6.54에서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내 명제를 통하여-그 위에 서서-그것을 뛰어넘을 때 결국 그것이 난센스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내 명제는 해명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는 내 명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볼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에 대해 해명하였고, 또 줄리언 벨이 시를 지었을 당시는 이미 후기 철학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했을 때였기 때문에 그의 풍자는 적절치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비트겐슈타인도 이에 대해 경멸적으로 "줄리언 벨들"(독창성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혐오감을 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고 6.54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으며 분란을 만들어 왔다. 로저 화이트는 논고 6.54의 해석에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의 노선이 있다고 설명한다.[21]
1. 귀류 논증 해석: 논고의 결론이 논고의 주장을 부정하므로 논고 자체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바 없는 소극적인 비판문이라는 해석이다. 즉, 논고란 논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사고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강한 주장의 배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들이 뒷받침되고 있으며 어떠한 피상적인 반론도 무시할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 상위 언어로 올라가는 해석: 러셀의 해석이다. 언어의 말할 수 없는 구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구조를 갖고 있는 다른 언어로 향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즉, 기존의 명제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다른 명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하기 방식을 언어에 관하여 명료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대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지 요점을 놓친 채 얼버무려 넘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주장되는 것은 두 번째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해석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이야기와 오해뿐"이라며 비난했다.영원히 고통받는 러셀
3. 논고 6.54를 무시하는 해석: 램지의 해석이다. 6.54를 수사학적 장식 문장으로 간주하고 논고에서 의도적으로 추방시키는 해석이다. 명제 6에서 멈추는 1916년 판 논고를 진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6.5 이하의 문단들이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전체에 걸쳐 주장했던 핵심 입장의 마지막 결론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는 것 외에는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4. 치료적 해석: 논고는 독자를 속여서 그 책의 내용이 마치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는 그러한 이론은 제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독자가 심사숙고해온 명제들은 스스로를 헛소리라고 비난하게 된다. 이 일을 통해서 독자는 그러한 이론을 구성하려는 충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는 명제와 논리학의 본성을 명료하게 해결하려고 고심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강렬한 열정과 부합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기묘한 치료 활동이란 이름을 빌어 그 모든 것을 내버리기 위한 초대를 했다는 점은 온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치료되었으면 당연히 내버려야 했을 그런 종류의 탐구를 1929년에 철학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 치료 활동이 매우 하찮은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는 점도 확실하다.
5. 전통적 해석: 귀류 논증 해석과 달리 헛소리 문장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과 '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가'를 둘 다 깨닫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의 난점은 추가되는 사실을 만들지 않으면서, 보여지기만 하는 사실들 속의 유형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 해석은 러셀이 썼던 것과 같은 '신비주의에 대한 불만'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1. 개요[편집]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저명한 철학서이다.
1914년에 집필이 시작되어 1918년에 최종 원고가 완성되었고, 1921년 독일에서 『자연철학 연보』에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 상태로 러셀의 서론과 함께 처음으로 게재되어 이후 1922년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에 의해 보완된 영역본이 출간되었다.[1]
2. 구성[편집]
『논리-철학 논고』는 러셀의 서론, 모토,[2] 머리말[3] 과와 본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본문은 제1번부터 제7번까지의 명제들과 각각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4] 그 부연 설명들을 포함한 전체 선언[개별] 명제는 모두 525개이다.
『논고』의 구조에서 주제들에 따른 분류는 대표적으로 글록과 랑게의 분류가 있다.
세계는 성립되어 있는 사항들의 총체(1)이며,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1.1)이다. 사실은 성립될 수 있는 사태(2)를 뜻한다. 원자적 사실을 주장하는 (참 또는 거짓인) 명제는 요소명제라고 불리며 이것은 이름(혹은 대상)으로 구성된다-그리고 이 이름(혹은 대상)은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4.1212). 요소명제는 가장 단순한 명제로 다른 요소명제를 함축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독립적이다).[16] 요소명제는 논리적 조작이 포함되어 있다(5.47).[17] 요소명제는 다른 요소명제와 관계하여 분자명제가 된다. 이러한 명제들은 사태의 성립과 불성립을 묘사하고(4.1), 참인 명제의 총체가 자연과학 전체(혹은 여러 과학의 총체)이다(4.11). 논리학의 명제는 항진명제(6.1)이고 따라서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고(5.142) 무의미하다(4.461). 논리는 선험적(6.13)이며(마치 빨간색 공과 파란색 공이 들어있는 상자 안에서 하나의 공을 꺼낸 것이 빨간색 또는 파란색 공인 것이 항상 참이며 빨간색 그리고 파란색 공인 것은 항상 거짓임이듯이) 명백히 뜻을 지닌 귀납법칙은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학의 법칙이 될 수 없고 선천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6.31). 미래의 사건들은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고, 인과 연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5.1361) 세계의 의의는 세계 밖에 있어야 하며, 비우연적으로 일어나고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세계 속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다시 우연적일 테니, 그것은 세계의 밖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논리가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고, 세계의 한계가 그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다이어그램을 그린다. (「논고」 6.1203)
러셀은 수를 논리적 개념들만을 써서 정의하던 중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그런 모든 집합들로만 이루어진 집합이 어떤 경우이든 모순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흔히 이발사의 역설로 불리는데 대강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마을 사람의 머리만을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다면 이발사 스스로 머리를 깎는 경우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으로 얘기될 수 있다. 이발사가 스스로 머리를 깎으면 자기 자신의 머리를 깎으니 깎을 수 없고, 스스로 머리를 깎지 못하면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사람이 되니 깎아야 한다.
라고 말한 뒤 3.333에서"어떤 명제도 자기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제 기호는 자기 자신 속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형이론'의 전부이다.)"
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유형 이론은 말할 수 없는(오직 보여질 수만 있는) 것을 말하려 했고, 올바른 표기법에서 러셀의 역설은 아예 생길 수 없으며 따라서 유형 이론은 불필요하다고 한다.[18] 분명 이발사 비유에서 "이발사는 마을 사람이다." 그러나 언표 내에서의 주체 '이발사'는 언표 행위의 주체로서의 '이발사'와 다르다. 살아 움직이는 마을 사람 '이발사'는 오직 보여질 수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은 표기만 같을 뿐 언표 내에서의 '이발사'는 실은 아무것도 지칭하지는 않는다. 이를 통해 거짓말쟁이 역설도 풀릴 수 있는데 내가 거짓말쟁이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보여질 수 있는 것으로 '거짓말쟁이인 나'와 '거짓말쟁이가 아닌 나' 두 개가 있을 뿐 "나는 거짓말쟁이다"는 실상 무의미한 말이 된다."……요컨대 함수 F(fx)가 자기자신의 독립변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F(F(fx))'라는 명제가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명제에서 외부 함수 F와 내부 함수 F는 상이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내부 함수는 Φ(fx)의 형식을 지니고, 외부 함수는 Ψ(Φ(fx))의 형식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두 함수에는 단지 'F'라는 문자만이 공통적인데, 그러나 그 문자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에 대해 러셀은 차이를 식별할 수 없는 두 존재자는 동일하다는 정의를 내린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5.5303 두 사물에 대해 그 둘이 동일하다는 말은 난센스이며, 하나의 사물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고 반박한다. 그래서 그는 러셀이 'a=a'나 'p는 명제이다'를 일부러 기호화하여 'p⊃p'로 쓰는 것을 거부하고 비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f(a,b).a=b'라고 쓰지 않고 'f(a,a)' 또는 'f(b,b)'라고 쓰며, '(∃x,y).f(x,y).~x=y'라고 쓰지 않고 '(∃x,y).f(x,y)'라고 쓴다. 이러한 입장은 제거주의적으로 오컴의 면도날과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사용되지 않는 기호는 의미가 없다."며 이것이 "오컴의 격언이 말하는 바이다."라고 한다(3.328)
3.4. 수학에 대한 견해[편집]
19세기 말 유럽수학계의 주요 떡밥이었던 '집합론은 과연 수학의 토대로 적절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논고」에서도 '수학에서 집합론은 전혀 쓸데없다.[19] '라는 말이 나온다! 집합론을 옹호한 스승 러셀과 또 다시 대비되는 부분. 그가 집합론이 가장 앞에 나오는 오늘날의 수학 교과서들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3.5. 역설[편집]
「논고」를 읽다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명제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동료 학자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령, 시인 줄리언 벨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러니한 태도를 풍자하며 시를 지었다.
그는 넌센스한 말을 하고, 수많은 말들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침묵하라는 자신의 맹세를 깬다.
윤리학, 미학에 대해 밤이나 낮이나 얘기하고,
이것저것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고 한다.
……어떤 문제에 관해서건 한 번이라도 보았는가?
루트비히가 법칙을 세우는 일을 피했던 것을.
사람들과 있을 때마다 우리들을 소리쳐 막고,
우리 말을 멈추게 한다. 그 자신은 더듬거리면서.
논쟁은 끝이 없다. 몰아붙이듯이, 열이 나서, 큰 소리로.
그런 잘못은 흔하며, 부분적으로 우리 모두 그렇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예술에 대해서 거만을 떠는 모습이란.[20]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6.54에서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내 명제를 통하여-그 위에 서서-그것을 뛰어넘을 때 결국 그것이 난센스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내 명제는 해명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 그는 내 명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볼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에 대해 해명하였고, 또 줄리언 벨이 시를 지었을 당시는 이미 후기 철학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했을 때였기 때문에 그의 풍자는 적절치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비트겐슈타인도 이에 대해 경멸적으로 "줄리언 벨들"(독창성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혐오감을 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고 6.54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낳으며 분란을 만들어 왔다. 로저 화이트는 논고 6.54의 해석에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의 노선이 있다고 설명한다.[21]
1. 귀류 논증 해석: 논고의 결론이 논고의 주장을 부정하므로 논고 자체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바 없는 소극적인 비판문이라는 해석이다. 즉, 논고란 논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사고를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강한 주장의 배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들이 뒷받침되고 있으며 어떠한 피상적인 반론도 무시할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 상위 언어로 올라가는 해석: 러셀의 해석이다. 언어의 말할 수 없는 구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구조를 갖고 있는 다른 언어로 향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즉, 기존의 명제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다른 명제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하기 방식을 언어에 관하여 명료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대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지 요점을 놓친 채 얼버무려 넘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주장되는 것은 두 번째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대로 반영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해석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 이야기와 오해뿐"이라며 비난했다.
3. 논고 6.54를 무시하는 해석: 램지의 해석이다. 6.54를 수사학적 장식 문장으로 간주하고 논고에서 의도적으로 추방시키는 해석이다. 명제 6에서 멈추는 1916년 판 논고를 진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6.5 이하의 문단들이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전체에 걸쳐 주장했던 핵심 입장의 마지막 결론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는 것 외에는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4. 치료적 해석: 논고는 독자를 속여서 그 책의 내용이 마치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이론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는 그러한 이론은 제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독자가 심사숙고해온 명제들은 스스로를 헛소리라고 비난하게 된다. 이 일을 통해서 독자는 그러한 이론을 구성하려는 충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는 명제와 논리학의 본성을 명료하게 해결하려고 고심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강렬한 열정과 부합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기묘한 치료 활동이란 이름을 빌어 그 모든 것을 내버리기 위한 초대를 했다는 점은 온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또 치료되었으면 당연히 내버려야 했을 그런 종류의 탐구를 1929년에 철학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 치료 활동이 매우 하찮은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는 점도 확실하다.
5. 전통적 해석: 귀류 논증 해석과 달리 헛소리 문장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과 '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가'를 둘 다 깨닫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의 난점은 추가되는 사실을 만들지 않으면서, 보여지기만 하는 사실들 속의 유형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 해석은 러셀이 썼던 것과 같은 '신비주의에 대한 불만'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4. 기타[편집]
- 「논고」는 난해한 내용 때문에 출판사가 출판하기를 꺼렸는데,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러셀의 명성에 힘입어 그의 서문으로 가까스로 출판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이 서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그는 러셀이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출판을 진지하게 보류할 생각을 했는데, 그런 가운데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비로 출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러셀은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신비주의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 사후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모든 추종자들이 나의 해설을 싫어했다는 것, 출판업자들이 나의 해설이 들어가야만 「논고」를 출판하겠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이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이 서문을 「논고」에서 뺄 작정이었으나 알프레드 에이어가 서문이 「논고」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며 "……비트겐슈타인이 생전에, 다른 사람이 자신에 관해 글을 쓰면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늘 불평했기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도 그의 말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 그대로 두게 된다.[22] 그러나 저자 본인이 서문에 불만을 표시했는데 후대의 편집자들이 이를 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 점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 체계적으로 보이는 본서의 서술 방식에 대해 일본의 철학자 아사다 아키라는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준엄하기 짝이 없다"며 볼멘소리를 한 적이 있다.[23]
- 일반적인 약자는 '논고'이나,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논철논'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어 약자는 영역본 서명의 두문자어인 'TL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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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역본의 제목이 라틴어인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인데, 이는 무어가 스피노자의 저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1670)에 대한 경의로 제안한 것이다.[2] "……그리고 웅성대거나 시끌시끌한 소리 말고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세 단어로 말할 수 있다."라는 퀴른베르거의 말을 「논고」의 모토로 삼았다. 거추장스러운 형이상학적 사변들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로 팽창주의적 진리론 보다는 축소주의적 진리론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3] 모토에 이어서 비트겐슈타인은 머리글에서 "사고에 한계를 그으려 한다."고 천명하고, 그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건너편에 있는 것은 그저 난센스라고 밝힌다.[4] (저자 주) 개별 명제들의 번호인 십진법 수들은 그 명제들의 논리적 무게, 즉 나의 서술 속에서 그 명제들에 놓인 역점을 암시한다. n.1, n.2, n.3 등의 명제들은 n번 명제에 대한 소견들이다. n.ml, n.m2 등의 명제들은 n.m 번 명제에 대한 소견들이다. 그리고 나머지도 같은 식으로 계속된다.(『논리-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역. 2020. 19p.)[5] Ludwig Wittgenstein: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UTB-Schöning, Paderborn, 1996.[6] 마르틴 하이데거,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5) 이정표2, 99, 103, 104. 강조는 원문 및 나무위키 편집자.[7] 아즈마 히로키,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5) 존재론적 우편적, 271~272. 강조는 원문. 젊은 시절의 아즈마 히로키는 둘 중 하이데거 편에 기울어져 있다.[8] 같은 책, 278.[9] 조지 버클리, 문성화 옮김.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0) 인간 지식의 원리론, 69~71, 75.[10] 박일호. (네이버 캐스트, 2010)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11] 루이스 캐럴, 마틴 가드너 주석, 최인자 옮김. (북플리오, 2010) Alice, 269. 러셀은 루이스 캐럴의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철학적인 견해로 보면 대단히 교훈적인 논쟁이기는 하지만, 만약 웃기게 쓰이지 않았더라면 사실 읽기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12] 조지 버클리, 문성화 옮김.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0) 인간 지식의 원리론, 135~141.[13] 같은 책, 325. "……전능한 정신의 편재와 성스러움 그리고 정의의 철저한 감각에 의해 관통되고 계몽된 영혼이 자기 법칙의 무자비한 훼손을 고집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 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눈이 도처에서 선과 악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이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현재하고 우리의 가장 내적인 사상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절대적이고 가장 직접적으로 하느님에 의존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러한 중요한 점들에 대해서 완전하고 의심할 바 없는 확신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지하고도 끈기 있게 심사숙고해야만 한다."[1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674.[1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9) 논리-철학 논고, 144~145. 부록 참고.[16] 이와 같은 생각은 과도기(「청색책·갈색책」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부정된다.[17] 이에 대해서 박정일 씨는 "사실상, p라는 요소 명제는 p ∨ p, p & (~p ∨ p), p ∨ (p ⊃ p) 등과 동치이므로, 그 요소 명제에는 ~, ∨, & 등과 같은 논리적 상항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하며, 김양순 씨는 "요소명제-부정 '~', 논리합 '∨', 논리곱 '·' 또는 '(x)'나 '(∃x)'등의 논리기호를 모두 포함하지 않는 형태로, 이름의 배열로서 나타낼 수 있는 명령을 '요소명제'라고 부른다. 요소명제를 부정하거나 논리정항에서 접속함으로써 복합적인 명제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18]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9) 논리-철학 논고, 36. 옮긴이 주.[1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97.[20] (평전, 372~373). 원문은 다음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에 줄리언 벨은 이 풍자가 비트겐슈타인 개인을 공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와 철학적 업적을 공격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비트겐슈타인의 도덕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21] 로저 화이트, 곽강제 옮김. (서광사, 201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론》 이렇게 읽어야 한다, 268~291.[22]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러셀 자서전 - 하, 405, 406.>[23] 아사다 아키라, 이정우 옮김. (새길, 1995)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184. "ᆢ준엄하기 짝이 없는 체계를 구축해 보인 비트겐슈타인ᆢ" 아사다 아키라는 이 책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나 논리실증주의나 모두 상품화되어 자본주의의 소비 회로에 갇혀버린다며 '유희의 시대'의 무차별적ᆞ무자비한 소비구조의 강력한 파괴력을 역설했다.